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벤첼 안톤 폰 카우니츠 (문단 편집) === [[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]] === 1741년 3월, 카우니츠는 [[토스카나 대공국]]의 [[피렌체]], [[교황령]]의 [[로마]], [[사르데냐 왕국]]의 [[토리노]]를 연이어 방문하며 이탈리아 반도에서 친오스트리아 여론을 형성하는 비밀 임무를 시작했다. 그 후 1742년 8월부터 1744년까지 토리노에서 오스트리아 대사를 지냈고 1744년 [[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]] 총독인 [[로트링겐 공국|로트링겐]] 공자 [[카를 알렉산더]][* 마리아 테레지아의 남편 [[프란츠 1세|프란츠 슈테판]]의 친동생.]와 함께 [[브뤼셀]]로 파견되었다. 그러나 1746년 2월 20일 브뤼셀은 3주간의 공성전 끝에 [[프랑스군]] 원수 [[모리스 드 삭스]]에게 항복했고, 카우니츠는 도시를 떠나 [[안트베르펜]], [[아헨]]으로 피신해야 했다. 그 후 그는 자신의 곤경을 연이어 호소한 끝에 6월에 본국으로 소환되었다. 1748년, 카우니츠는 오스트리아의 대표로서 엑스라샤펠 조약에 서명했다. 당시 [[프랑스 왕국|프랑스]]는 브뤼셀을 포함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를 점거하고 있었는데, 그는 특유의 언변과 끈기를 발휘해 프랑스 대표를 설득한 끝에 프랑스가 이 지역을 오스트리아에게 돌려주게 했다. 또한 그는 [[프로이센 왕국]]이 [[슐레지엔]]을 점유하는 걸 인정하고 [[스페인]]에게 [[파르마 공국]]을 양도하는 대가로 "여성에게도 왕위 계승이 허용된다"는 국사조칙이 모든 국가에게 승인되게 해 마리아 테레지아의 입지를 확고히 했다. 그는 이러한 성과로 오스트리아의 명 외교관으로서 명성을 날리기 시작했다. 하지만 그는 슐레지엔을 프로이센에게 내준 것을 두고두고 한스러워 하는 마리아 테레지아의 의향에 따라 프로이센을 약화시키기 위한 방안을 모색한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